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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정도 고민한 후 어제보다 파운데이션을 조금 짙게 발랐다. 눈썹은 그리지 않았다. 옷은 그대로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냉장고에서 500밀리리터짜리 생수를 꺼내 지갑, <에어플레인>과 함께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어제보다 천천히 걸었다.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생수를 마시면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파랑, 하양, 초록, 빨강. 짙고 선명한 색에 눈이 부셨다. 바로 코앞까지 와 있는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색깔이 보다 풍성해지리라.

힐츠가 저만치 보였다. 나는 눈앞으로 늘어진 앞머리를 귀 뒤로 반듯하게 넘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 정면에 있는 카운터를 보니 주인인 듯한 아저씨가 서 있었다. 만약을 생각해 어제와 같은 시간에 왔는데. 그렇다고 히로키가 반드시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조금 실망스러웠다. 뭐라고 하면서 비디오를 돌려주어야 하나 잠시 생각하는데, 오른쪽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루미가 미소 띤 얼굴로 진열장과 진열장 사이의 통로를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히로키가 다가와 바로 옆에 섰다. 나는 히로키를 마주 보고 <에어플레인>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고마웠어요."

"재미있던가요?"


히로키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굉장히 재미있던데요.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웃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다행이네요."


히로키는 입술이 좍 벌어지게 미소 지으며 기뻐했다. 그리고 어제처럼 또 고개를 약간 갸웃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 말을 하면서, 이 자리를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히로키가 잠깐만 기다리라면서 재빨리 통로 쪽으로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히로키는 어제처럼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것도 아주 재미있어요."


나는 테이프를 받아들면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럼, 볼게요."


히로키는 머쓱한 듯이 눈과 눈썹을 찡그렸다. 둘 사이에 침묵이 프르면서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고 말았다. 내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카운터로 걸음을 옮기려 하자 히로키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것도 서비스입니다."


밖으로 나와 비디오의 제목을 보았다. <킹핀>이라고 쓰여 있었다. 히로키는 왜 이렇게 제목이 이상한 영화를 권하는 걸까?